[책 속에 스며든 클래식]
#59. 중국 시인 설도의 춘망사, 김억의 한시번역시집 망우초, 그리고 김성태의 가곡 동심초
7월호에 실린 최용건 화백의 에세이 ‘진동리 일기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에서 최화백이 인적이 드문 시골 생활을 하며 관현악 작품들보다는 가곡을 더욱 자주 듣게 되었음을 언급할 때 특히 자주 듣는 가곡으로 손꼽은 곡이 바로 ‘동심초’입니다.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며 가장 많이 사랑받는 가곡으로도 손꼽히는 이 ‘동심초’는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입니다. 이 곡의 가사의 탄생은 무려 12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시를 제일 처음 쓴 시인은 바로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자 기녀였던 ‘설도’입니다.
‘설도 (薛濤, 슈에타오, 768?-832)’는 8세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매우 총명한 아이였으나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궁핍해진 삶을 견디지 못하고 16세에 기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악기 (樂妓)’, 즉 수청을 드는 것이 아닌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고급 기생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설도는 500여수의 시와 ‘금강집 (錦江集)’이라는 5권의 문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100수가 채 되지 못하는 시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도 (洪度)’란 자를 썼던 설도의 시들 중 가장 유명한 ‘춘망사 (春望詞)’는 ‘떠나는 봄을 그리며’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설도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감찰어사 ‘원진 (元稹, 유안췐, 779-831)’에게 보낸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4년간 사랑했던 원진이 다른 관직에 임명되며 헤어지게 되었고 이 ‘춘망사’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나, 답장을 보낸 원진이 다른 이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 맹세하였는데요. 그녀가 마지막 사랑에게 보낸 시인 ‘춘망사’는 4개의 수로 이뤄져 있습니다.
춘망사 (春望詞) – 떠나는 봄을 그리며
화개불동상 (花開不同賞) – 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사람이 없고
화락불동비 (花落不同悲) –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사람이 없네
욕문상사처 (欲問想思處) – 묻고 싶소, 그대는 어디에 계신지
화개화락시 (花開花落時) – 때맞춰 꽃들만 피고 지는구나.
남초결동심 (攬草結同心) – 풀을 따서 내 이 마음과 함께 묶어
장이유지음 (將以遣知音) – 지음의 님께 보내려 하지만
춘수정단절 (春愁正斷絶) – 봄날 시름에 님의 소식은 속절없이 끊어지고
춘조복애음 (春鳥復哀吟) – 봄새만 다시 찾아와 애달프게 우는구나
풍화일장로 (風花日將老) –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가기유묘묘 (佳期猶渺渺) –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불결동심인 (不結同心人) –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공결동심초 (空結同心草)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가
나감화만지 (那堪花滿枝) – 어떻게 견딜까, 가지 가득 핀 저 꽃이여
번작양상사 (煩作兩相思) – 괴로워라, 사모하는 이 마음은 어이할꼬
옥저수조경 (玉箸垂朝鏡) – 눈물이 아침 거울에 떨어져 흐르네
춘풍지불지 (春風知不知) – 봄바람아 넌 이런 내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자신을 져버린 사람에의 한없는 그리움과 사랑을 그린 설도의 ‘춘망사’의 제3수는 1934년, 김억의 한시번역시집 ‘망우초 (忘憂草)’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안서 (岸曙)’란 호를 써 ‘김안서’라고도 불리는 ‘김억 (金億, 1896-?)’은 우리나라의 국민 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개인의 심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한국 자유시를 개척한 인물로도 높게 평가되지만 자신의 제자 김소월과 전혀 다른 행보를 걸은 부끄러운 스승의 모습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김억은 일본육군기념일을 맞아 이 날을 기념하는 시 ‘육군기념일에서’나 태평양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 ‘신년송’, 카미카제 사망자를 기리는 시 ‘님 따라 나서자’를 신문에 기고하는 등의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걸으며 친일 문학인과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는 불명예를 함께 지니고 산 인물로 6.25 전쟁 이후 납북되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 (1921)’를 비롯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한시의 번역과 민요를 발굴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창작 시집 ‘금잔디 (1925)’, ‘민요시집 (1948)’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첫 창작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 (1923)’은 우리 나라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며 김억은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과 창작 시집을 발간한 인물 기록되는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김억은 1930년 초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설도의 시 ‘춘망사’를 번역하여 기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는 1934년 자신의 한시번역집인 ‘망우초’에 춘망사의 제3수를 ‘동심초 (同心草)’란 제목으로 번역하여 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망우초의 원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1943년에는 아예 ‘동심초’란 제목으로 이 시를 주축으로 한 시집을 펴냅니다. 김억은 시집 ‘망우초’와 시집 ‘동심초’에서 이 ‘동심초’ 시를 다르게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작곡가 김성태는 이 시를 접하고 시집 ‘망우초’에 등장한 동심초 시를 1절로, 시집 ‘동심초’에 등장한 등심초 시를 2절로 하여 노래를 작곡하게 되고, 그 곡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가곡인 ‘동심초’가 되었습니다.
가곡 ‘동심초’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날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친일파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동심초를 비롯하여 김소월의 시에 가사를 붙인 가곡 ‘산유화’, 이별의 노래, 못잊어, 즐거운 우리집과 같은 100곡이 넘는 가곡과 ‘잘자라 우리 아가’, ‘엄마 아빠’, ‘즐거운 봄’와 같은 동요를 우리에게 남긴 작곡가가 바로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태 (1910-2012)’입니다. 고향생각, 희망의 나라로, 산들바람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현제명’과 가곡 ‘망향’, ‘향수’, ‘모란이 피기까지’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채동선’에게서 작곡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성태는 국민훈장을 비롯하여 3.1 문화상, 5.16 민족상을 받았으며 잔인하였던 시대의 흐름 속에 피폐해진 한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음악가로 현재까지 평가 받고 있습니다. 특히 1945년 발표한 ‘동심초’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며 현재는 한국 가곡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몇몇 가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때 심사임당이 쓴 시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던 당나라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 ‘설도’가 쓴 시 ‘춘망사’, 그리고 시인 김억이 자신만의 예술혼을 불어넣어 새롭게 탄생시킨 시집 망우초 속 ‘동심초’, 그리고 김성태가 이 시에 우리 민족의 한과 얼을 접목시켜 작곡한 우리나라 대표 가곡이 바로 ‘동심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식물의 하나인 것으로 오해하거나 ‘골풀’이라고도 불리는 ‘등심초 (燈心草, Juncus effuses)’를 잘못 쓴 것이라 오해도 받지만 사실 ‘풀잎을 맺으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굴곡 많은 시는 바로 슬픈 사랑을 그리는 편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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