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개봉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 “피아니스트 (The Pianist)”는 한 피아니스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올리버 트위스트”, “테스” 등의 영화로 유명한 헐리우드 대표 유대계 출신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 1933~)”가 연출을 맡은 유태인 학살을 주제로 삼은 “홀로코스트 (Holocaust)”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 (Wladyslaw Szpilman, 1911~2000)”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1939년,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 및 점령되기 전까지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음악가였습니다. 독일의 점령 후 슈필만과 그의 가족, 친구들은 모두 바르샤바의 “게토 (Ghetto, 유대인 강제 거주 거리나 지역)”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를 다시 탈환하고 나치에게서 해방되기까지 약 6년의 시간동안 그 곳에서 추위와 기근, 그리고 학살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당시 35만명의 유태인이 게토에 강제 이주되었으며, 1942년 트레블랑카 학살 수용소로 30만명 이상의 유태인이 이송되어 죽음을 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 후에도 대량 학살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소련군이 게토 지역을 해방시켰었을 때는 대부분의 게토 주민들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유태인은 슈필만을 포함하여 2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슈필만이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우연히 만나게 된 교육자 출신의 독일 육군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 (Wilhelm Adalbert Hosenfeld, 1895~1952)”에게서 음식 등의 생존 필수품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인종차별 정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호젠펠트, 그러나 그는 1952년 소련군에게 잡혀 포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폴란드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슈필만은 호젠펠트의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호젠펠트와의 인연과 자신이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내용을 담은 자서전 “도시의 죽음 (Smierc Miasta)”을 출판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에게 검열을 당해야 하였던 이 책은 50여년이 지난 1998년 “피아니스트”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그 역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 학살과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던 유태인이었습니다. 그는 비인륜적인 사건을 겪고 살아남은 이 피아니스트의 처절하기까지한 삶과 생존을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처절하게 영화에 담아내었으며, 이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함께 홀로코스트 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슈필만이 게토의 폐허 속 어느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호젠펠트와 처음 마주치고 그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그의 영화 속에서도 그의 자서전 속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데요.
슈필만은 이 순간을 아래와 같이 책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건반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손가락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어쨌든 난 지금 피아노를 쳐서 몸값을 치뤄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거의 2년 반 동안이나 연주를 하지 못했다. 손가락은 뻣뻣했고, 켜켜이 때로 덮여 있었으며, 은신해 있는 건물에 불이 나는 바람에 손톱도 깎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유리창도 없는 방 안에 방치된 피아노는 기계 장치가 습기로 팽창되어 건반이 아주 뻑뻑하였다. 나는 쇼팽의 야상곡 내림다단조를 쳤다. 제대로 조율도 안 된 피아노 줄의 탁한 울림이 텅 빈 집과 계단을 지나 길 건너편에 있는 빌라의 폐허에 부딪쳐 맥 빠지고 우울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연주를 끝내자 그 침묵은 전보다 한층 더 음울하고 괴괴했다. 거리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연주한 작품은 바로 “프레데릭 쇼팽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 의 “야상곡 20번 내림다단조 (Nocturne No.20 in c scharp minor, B.49)”입니다.
쇼팽은 폴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알려져있지요.
20세의 나이에 조국 폴란드를 떠나 이름도 “프리데리끄 프란치세끄 쇼팽 (Fyderyk Francizek Chopin)”에서 프랑스식으로 개명하며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쇼팽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국심을 담고있는 작품들을 많이 작곡하였습니다.
그 중 “녹턴 (Nocturne)”, 즉 야상곡은 쇼팽이 1827년부터 1846년까지 작곡한 21개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까지도 피아노 독주 작품으로 자주 연주되는 매우 완성도가 높은 곡들로, 거의 대부분 A-B-A의 세도막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20번 내림다단조는 1~18번 작품과 달리 쇼팽의 사후에 출판된 4곡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녹턴이 들어간 19~21번의 작품은 쇼팽이 프랑스로 건너가기 직전 폴란드를 떠나 비엔나에 머물 때인 1830년에 작곡된 작품들로 1번보다도 작곡 시기는 앞선 작품들입니다.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 (Ludwika Jedrzejewicz Chopin, 1807~1855)“에게 헌정된 야상곡 20번 내림다단조는 꿈 속을 거니는 듯 선율이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무거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무채색의 우울하면서도 격렬함을 지니고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는 좀더 강렬한 인상을 위해 쇼팽의 “발라드 1번 (Chopin Ballade No.1 in g minor, Op.23)”이 연주되었으나,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독일 장교 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도 야만적인 현실 앞에서 그래도 목숨과 희망을 갈구하는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폴란드인 음악가였던 슈필만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곡이 쇼팽의 녹턴 20번 아니었을까요?
현재는 “피아니스트”란 이름으로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폴란드 음악가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의 자서전 “도시의 죽음”, 그리고 처절한 비극을 그려낸 폴란드 작곡가 쇼팽의 피아노 작품 야상곡 20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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